그 날, 한국과 캐나다는: 3월 9일~15일
환절기인 3월의 역사속엔 한국과 캐나다를 관통하는 거대한 두 사건이 숨어 있다. 하나는 국가 간의 차가운 이성이 빚어낸 '약속', 다른 하나는 한 인간의 뜨거운 가슴이 만들어낸 '탄생'이다.
2014년 3월 11일
이날은 한국과 캐나다의 현대사에서 실질적인 '경제적 혈맹'이 맺어진 날이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스티븐 하퍼(Stephen Harper) 캐나다 총리가 한-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에 공식 서명했다. 협상 개시 9년 만의 결실이었다. 이 서명은 이민 1세대들의 눈물겨운 정착기가 비로소 '주류(Mainstream)'의 인정으로 보상받은 상징적 사건으로, 협정 이후 캐나다 내 한국 청년들의 워킹홀리데이 쿼터가 늘어났고, 토론토국제영화제(TIFF)를 비롯한 문화 행사에서 한국 콘텐츠의 위상은 급격히 높아졌다. 이날은 캐나다가 한국을 '함께 가야 할 파트너'로 완전히 인식을 전환한 날로 기억되어야 한다.
1919년 3월 12일
3월 12일은 특정 사건의 시작일이라기보다, 1919년 3.1 운동의 참상을 목격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펜끝이 가장 날카롭게 움직였던 시기다. 당시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이나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rierson, 1868~1965) 같은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은 3월 중순으로 접어들며 더욱 악랄해지는 일제의 탄압을 목격했다. 그들은 단순히 종교적 구원만을 외치지 않았다. 그들은 본국 장로회와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조선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다. 이들은 정당하다." 그들의 기록은 훗날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와 합쳐져, 캐나다 연합교회가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데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1889년 3월 15일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34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石虎弼)) 박사가 영국 워릭셔에서 태어난 날이다. 그는 이후 캐나다로 이주해 토론토 대학교(온타리오 수의과대학)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생일이 3월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운명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한국에 온 뒤, 1919년 3.1 운동 현장을 자전거로 누비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다.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을 현장 답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전 세계에 폭로한 것도 그다. 일제는 그를 '가장 과격한 선동가'라며 암살하려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한국의 흙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그는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다. 이민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캐나다)이 배출한 인물이 우리 조국(한국)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를 기억하고 기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이민 사회의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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