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속 빛바랜 사진 한 장의 무게
장롱 속 빛바랜 사진 한 장에는 이민자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잊혀진 것은 역사가 될 수 없기에, 사라지기 전 당신의 사소한 기록을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야 합니다.
- 개인이 소장한 사소한 기록이 모여 위대한 이민사가 된다 … 지금이 ‘골든 타임’
- ‘캐나다 한인사이버박물관’은 개방형 박물관 … 작은 기적을 기다린다
- 명심하자. 잊혀진 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 기록하는 자만이 역사를 갖는다.
이민자의 삶은 ‘짐 싸기’와 ‘짐 풀기’의 연속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제나라를 떠나 낯선 곳에 처음 도착했던 때, 이민 가방 몇 개에 눌러 담았던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이민자들은 잊을 수 없다. 그 후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끊임없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그때마다 가장 처치 곤란하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장롱 깊숙한 곳, 곰팡내 나는 앨범과 누렇게 변색된 편지들이다. 자식들은 “이젠 스캔해서 파일로 보관하시라”며 핀잔을 주지만, 디지털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물성(物性)의 기억이 그 안에 있다. 오늘 나는 그 ‘처치 곤란’한 잡동사니들이 실은 우리 이민 사회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사료(史料)임을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지난 25년간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많은 동포분을 만났다. 크고 작은 여러 행사를 치르고, 프로그램을 연출할 때 뼈저리게 느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기록의 부재’다. 우리는 너무 바빴다. 낯선 땅에 뿌리내리고, 먹고살고, 자식들 가르치느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소위 ‘성공한 이민자’의 기준은 번듯한 집과 좋은 차, 자녀의 명문대 진학이나 전문직 진출 여부로만 재단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 실패와 좌절의 순간들이 담긴 기록들은 ‘성공 신화’의 그늘에 가려져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권력자가 남긴 거대 담론(Grand Narrative)만이 역사가 아니다. 미시사(Micro-history)의 관점에서 볼 때, 1970년대 블로어 한인타운 식당의 손때 묻은 메뉴판 하나가 정부의 외교 문서보다 더 생생한 이민사다. 어느 파독 광부 출신 아버지가 캐나다로 와서 처음 받은 주급 명세서, 어느 간호사 어머니가 한국의 가족에게 보낸 눈물 젖은 항공 우편, 유학생 시절 끓여 먹던 라면 봉지 뒤에 적어둔 메모들. 이것들은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다. 척박한 이국땅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어떻게 생존하고 적응했는지를 증명하는 인류학적 보고서다.
문제는 지금이 ‘골든 타임’이라는 사실이다. 이민 1세대, 소위 ‘올드타이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이 평생 장롱 속에 간직해 온 귀중한 자료들이 유품 정리 과정에서 무더기로 폐기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한국어를 모르는 이민 2세, 3세들에게 부모의 일기장이나 낡은 사진은 그저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힌 종이 쓰레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버려진다면 한인 커뮤니티 전체의 문화적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유대인 커뮤니티나 일본계 캐나다인들이 자신들의 핍박과 정착의 역사를 끈질기게 수집하여 박물관을 짓고 후세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을 보며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들은 기록함으로써 존재하고, 우리는 잊음으로써 사라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리적 건물의 박물관은 막대한 예산과 유지 보수 비용이 든다. 게다가 때가 되면 간간히 불거지는 커뮤니티의 불미스런 소란이나, 보여주기식 행사에 급급한 여러 단체들을 볼 때, 오프라인 박물관 건립은 시작부터 애물단지가 될 공산이 크다. 그래서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대안으로 ‘캐나다 한인사이버박물관’ 구축을 제안한다.
사이버(Cyber)란 주로 인터넷 같은 통신 환경을 통해서 정보가 교환되고 공유되는 컴퓨터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이버 박물관이란 인간의 상상력이 현실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으로 사용자가 원하는 자료와 다양한 정보를 멀티미디어 기술로 공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박물관이다. 지금까지 인터넷 박물관, 디지털 박물관, e-박물관, 온라인 박물관, 하이퍼 박물관, 웹 박물관, 가상 박물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모두 유사한 기능의 ‘사이버 박물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디지털 수장고(Digital Archive)는 유물을 무한정으로 보관할 수 있으며, 언제나 많은 세계 도처의 이용자들이 관람할 수 있고, 디지털 데이터는 손실 없이 무한정으로 복사가 가능해 물리적 수명과 관계없이 보존할 수 있는 것 등이 큰 장점이다. 즉, 사이버 박물관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라는 개방형 박물관 구상이 가능한 미래형 박물관이다.
밴쿠버의 초기 정착자가 몬트리올 유학생의 기록을 열람할 수 있고, 토론토의 2세가 핼리팩스 할아버지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웹사이트 구축이 아니다. 흩어져 있는 개인의 기억을 디지털 아카이빙(Digital Archiving) 기술로 엮어내, 검색 가능하고 공유 가능한 ‘집단 지성’을 토대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처럼 사이버 박물관은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범동포적인 자료 기증 캠페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거창한 보물이 필요한 게 아니다. 1980년대 한인회 주최 야유회 사진, 초창기 한글학교 교재, 폐업한 비디오 대여점의 목록, 교회의 주보 모음 등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모든 것이 기증 대상이다. 각 가정의 장롱 문을 열어야 한다. 동포 언론들은 이 캠페인을 진심으로 보도하고, 학계 전문가들은 수집된 자료의 맥락(Context)을 분석하여 스토리텔링을 입혀야 한다. 한국정부기관인 재외동포청 역시 K-Pop 공연이나 경제인 대회 같은 화려한 행사 지원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초 사료 발굴 사업에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것이 진정한 재외동포 정책의 기본이다.
이민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도 커뮤니티의 질적 성숙을 고민해야 할 때다. 밥 한 끼 사는 것이 리더십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렇게 치열하게 사셨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을 남기도록 격려하는 일이 진정한 리더의 역할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어느 한가한 시간에 장롱 속을 한번 뒤져보라고 정중히 당부드려 본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 촌스러운 옷차림으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날의 당신과 마주해 보시라. 그 사진 한 장에는 낯선 땅의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가족을 지키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여러분의 그 사소한 기억이 모여 우리 이민사의 거대한 물줄기로 변하는 것이다. 사진 뒤에 촬영 날짜와 장소, 그리고 그때의 감정을 한 줄이라도 적어두자. 그리고 그것을 공유할 준비를 하자. 우리의 역사를 남의 손에 맡기지 말고, 우리 스스로 기록하고 보존하자. 그것이 이 모자이크 사회 속에서 한국인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며, 훌륭하게 자라준 우리 아들딸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잊혀진 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 기록하는 자만이 역사를 갖는다.
명심하자, 그리고 작은 기적을 기다리자.

(사진설명) 다양한 유물을 고해상도로 볼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이버뮤지엄
사이버(Cyber)박물관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라는 개방형 박물관 구상이 가능한 미래형 박물관이다. 인터넷으로 사용자가 원하는 자료와 다양한 정보를 멀티미디어 기술로 공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박물관으로, 지금까지 인터넷 박물관, 디지털 박물관, e-박물관, 온라인 박물관, 하이퍼 박물관, 웹 박물관, 가상 박물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모두 유사한 기능의 ‘사이버 박물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디지털 수장고는 유물을 무한정 보관할 수 있으며, 세계 도처의 이용자들이 관람할 수 있고, 디지털 데이터는 무한정 복사가 가능하고, 수명과 관계없이 보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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