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장벽보다 높은 마음의 벽
우리를 진정으로 고립시키는 것은 혀끝에서 맴도는 서툰 영어가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 빗장을 걸어 잠근 ‘닫힌 마음’이다.
- 어설픈 영어 실력을 탓하기 전에, 동포에게 진심을 말하지 않는 우리의 침묵을 탓하라.
- 원주민의 ‘토킹 스틱’과 라틴계의 ‘테르툴리아’에서 배우는, 계급장 떼고 마주 앉는 지혜.
- 보여주기식 행사는 이제 그만, 치열한 논쟁과 경청이 살아 숨 쉬는 ‘광장’을 열어야 한다.
캐나다에 온 지 4반세기가 넘었지만 여전히 많은 동포가 “영어가 안 돼서 힘들다”고 토로하는 걸 자주 듣는다. 어지간히 실력자가 아니면 낯선 땅의 언어가 주는 위압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의 강한 반증이다. 하지만 수많은 이민자의 사연을 접하며 깨달은 진실이 하나 있다. 우리를 진정으로 고립시키는 것은 혀끝에서 맴도는 서툰 영어가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 빗장을 걸어 잠근 ‘닫힌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언어 장벽(Language Barrier)을 탓하며 타 커뮤니티와의 교류를 주저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자문해보자. 한국말이 통하는 우리끼리는 과연 소통하고 있는가? 유창한 한국어로 대화하는 가정 내에서 부모와 자녀의 마음은 연결되어 있는가? 같은 한국어를 쓰는 한인회와 유학생, 올드 타이머와 신규 이민자 사이에는 강물처럼 흐르는 대화가 존재하는가? 안타깝게도 대답은 ‘아니요’에 가깝다. 우리는 언어가 달라서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내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서 입을 닫고 산다. 이 거대한 ‘불통(不通)’의 벽을 넘기 위해, 나는 오늘 캐나다 내 타 민족들의 소통 방식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들에게서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애초에 갖지 못했던 ‘마음의 문을 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먼저 캐나다 원주민(First Nations)들의 ‘셰어링 서클(Sharing Circle)’을 보자. 그들은 갈등이 생기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둥글게 모여 앉는다. 그곳에는 상석도, 하석도 없다. 오직 ‘토킹 스틱(Talking Stick)’을 쥔 사람만이 말할 권리를 가지며, 나머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리 말이 느리고 서툴러도 끝까지 경청해야 한다. 추장이라 할지라도 스틱이 없으면 침묵해야 한다. 이 단순하고도 강력한 규칙은 ‘말 잘하는 사람’의 독점을 막고, ‘말주변 없는 사람’의 진심을 이끌어낸다. 그들은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려 애쓰지 않는다. 투박하지만 진실한 마음을 꺼내 놓는 것에 집중한다. 그 안에서 언어의 유창함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라틴계 이민자들의 모임인 ‘테르툴리아(Tertulia)’ 문화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멕시코나 콜롬비아 출신 이민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예술, 정치, 시사 문제를 토론하는데, 여기에는 남녀노소, 직업의 귀천이 없다. 건설 노동자가 의사에게 자신의 철학을 힘주어 전하고, 대학생이 은퇴한 노인에게 최신 트렌드를 설명한다. 그들은 서로의 억양(Accent)을 비웃지 않으며, 오히려 그 다름을 즐긴다. 그들의 시끌벅적한 대화 속에는 ‘우리는 하나’라는 끈끈한 유대감이 흐른다. 영어가 조금 서툴러도, 스페인어가 섞여 나와도 그들은 눈빛과 제스처,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완벽하게 소통한다.
반면 우리의 모임은 어떠한가. 어느 올드 타이머의 표현을 빌리자면, ‘30여 년간 지켜본 커뮤니티의 행사는 대부분 일방통행’이었다고 한다. 높은 단상에는 회장님과 내빈들이 앉고, 청중은 아래에서 지루한 축사를 듣는다. 마이크는 권력자들의 전유물이고, 질문이나 토론은 ‘예의 없는 행동’이나 ‘행사 진행 방해’로 치부된다. 이러니 젊은 세대가, 신규 이민자가, 그리고 비주류가 설 곳이 없다.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이자 구조의 문제다.
이제 우리는 변해야 한다. 영어 공부에 들이는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마음 공부’와 ‘경청 연습’에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타운홀 미팅(Town Hall Meeting)’의 정례화를 강력히 제안한다. 여기서 말하는 타운홀 미팅은 보여주기식 간담회가 아니다. 북미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그 원형 그대로, 계급장을 떼고 만나는 치열한 토론의 장(場)이어야 한다.
첫째, 형식을 파괴해야 한다. 단상과 단하의 구분을 없애고 원형으로 앉자. 1세대 원로, 1.5세 전문직, 2세 대학생, 그리고 갓 도착한 워킹홀리데이 청년이 동등한 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한다. 사회자(Moderator)는 권위적인 인물이 아니라, 양쪽의 말을 공정하게 조율할 수 있는 중립적이고 유연한 인물이어야 한다. 훌륭한 사회자가 있으면 개와 고양이도 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둘째, 주제를 성역 없이 개방해야 한다. “커뮤니티는 왜 젊은 층을 끌어안지 못하는가?”, “기성세대의 부동산 투자가 이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유학생들이 겪는 부당한 대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 그동안 쉬쉬했던, 그러나 모두가 느끼고 있던 ‘불편한 진실’을 식탁 위에 올려야 한다. 갈등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건강한 갈등과 논쟁은 고름을 짜내는 과정이다. 그 아픔을 견뎌야 새 살이 돋는다.
셋째, 경청의 룰을 세워야 한다. 원주민의 토킹 스틱처럼, 발언자가 말할 때는 누구도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특히 연장자가 “네가 어려서 잘 모르는데”라며 말을 자르는 순간, 그 타운홀은 실패다. 서툰 한국어라도, 혹은 영어가 섞인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언어는 수단일 뿐,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다.
넷째, 이 자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록의 힘을 믿는다. 타운홀 미팅에서 나온 다양한 목소리, 그 날것의 기록들은 훗날 ‘캐나다 한인 이민사’의 가장 생생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무용담만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실패한 사람의 한숨, 소외된 사람의 외침, 그리고 이를 해결하려 했던 공동체의 노력이 기록될 때, 후손들은 우리를 ‘소통하려 애썼던 세대’로 기억할 것이다.
캐나다 주류 사회를 보라. 정치인들은 선거철이 아니어도 끊임없이 타운홀 미팅을 열어 시민에게 깨지고 혼나면서 정책을 다듬는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힘이고,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접착제다. 우리 한인 사회도 이제 그럴 때가 되었다. 밥 한 끼 사며 생색내는 모임 대신, 쓴소리도 달게 듣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캐나다에서 성장하며 보여준 것은, 영어가 완벽해서 친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갔기에, 친구들이 그들의 서툰 영어를 이해해주고 기다려준 것이다. 언어는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마음이 환하면 언어도 빛나고, 마음이 어두우면 아무리 유창한 언어도 공허한 소음에 불과하다.
‘텃세’라는 벽, ‘서열’이라는 벽, 그리고 ‘세대’라는 벽. 이 모든 벽은 결국 우리가 스스로 쌓아 올린 마음의 벽돌들이다. 이제 그 벽돌을 하나씩 빼내어, 서로를 잇는 다리를 놓자. 영어를 못해서 주류 사회에 못 들어가는 것이 억울한가? 그렇다면 먼저 우리끼리의 소통부터 뚫어보자. 안에서도 막힌 물이 밖으로 흐를 리 만무하다. 오늘, 누군가 용기를 내어 “우리, 모든 걸 떼고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라고 제안한다면, 뭉근한 이민 1세대라면 기꺼이 그 자리에 가장 먼저 달려가 앉을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그들의 목소리를 이어주는 ‘소통의 스피커’가 될 것이다. 언어의 장벽보다 높은 마음의 벽, 이제는 우리가 그 벽을 허물 차례다.
(이 콘텐츠는 생성형 AI를 이용해 작성되었으며, 관리자의 부분적 수정 및 검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