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eul Logo
...

여기 그리고 지금 사이의 공간

과거를 회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마주하고 화해할 때 비로소 온전한 '지금'을 살아낼 수 있다.

  • 향기가 기억을 부르면, 소녀는 과거로 사라진다. 9시간의 공백 속 숨겨진 엄마의 진실
  • "너를 지키기 위해 숨겼어"… 아버지의 거짓말과 밴쿠버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여정
  • 기억의 틈새를 메우고, 상실을 넘어 온전한 '지금'을 되찾는 눈부신 성장 드라마

후각, 기억을 여는 가장 원초적인 열쇠

길을 걷다 스쳐 지나가는 냄새에 발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회상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향기를 맡고 유년 시절을 떠올렸듯, 후각은 기억의 문을 여는 가장 강력하고 원초적인 열쇠로 꼽힌다. 그러나 단지 추억에 잠기는 것을 넘어, 냄새를 매개로 물리적인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소녀가 있다. 사라 석(Sarah Suk)의 신작 소설 『여기, 그리고 지금 사이의 공간(The Space between Here & Now)』은 이처럼 기묘하고도 애잔한 설정을 지닌 주인공 '에이미 로(Aimee Roh)'의 서사를 다룬다.

축복이 아닌 저주, '감각적 시간 왜곡 증후군'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는 17세 소녀 에이미는 '감각적 시간 왜곡 증후군(Sensory Time Warp Syndrome, STWS)'이라는 희귀 질환을 앓고 있다. 특정 냄새를 맡으면 그와 연결된 과거의 기억 속으로 이른바 '타임슬립'을 하게 되는 증상이다.

SF 장르에 등장할 법한 초능력처럼 들릴 수 있으나, 에이미에게 이는 일상을 파괴하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학교 복도에서 낯선 향수 냄새를 맡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는 도중에도 예고 없이 과거로 내던져지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공포는 주인공을 온전한 '현재'에 발붙이지 못하게 억압한다. 육체는 '여기(Here)'에 존재하지만, 정신과 존재는 끊임없이 '과거의 어딘가(Now of the past)'를 부유하는 형국이다. 딸의 증상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안타까움을 넘어 강박적이다. 병을 개인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아버지의 태도는, 에이미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삶을 더욱 위축시키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사라진 어머니와 9시간의 공백, 그리고 발아하는 의심

위태롭던 에이미의 일상은 무려 9시간 동안 현실에서 실종되는 전례 없는 사건을 겪으며 급물살을 탄다. 이 기나긴 시간 동안 에이미가 머물렀던 과거는 어린 시절 가족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다.

문제는 타임슬립을 통해 목격한 어머니의 모습이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와 철저히 상치된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족을 버렸다고 주장해 왔으나, 냄새를 매개로 도달한 과거 속 어머니는 결코 자식을 버릴 비정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9시간의 미스터리'는 에이미의 내면에 깊은 의심의 불씨를 당긴다. 자신의 기억과 아버지의 증언 중 무엇이 진실인지, 왜 유독 어머니에 대한 기억만 흐릿하고 왜곡되어 있는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에이미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안전한 울타리—혹은 감옥—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밴쿠버에서 한국으로… 진실을 향한 공간의 이동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에이미는 한국행을 택한다. 작가는 주인공의 주 무대를 밴쿠버의 대자연에서 서울의 복잡한 도심으로 옮겨 놓는다. 이러한 공간의 이동은 단순한 배경 전환을 넘어, 에이미가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대면하는 상징적 여정으로 기능한다.

한국에서의 서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실종된 어머니의 흔적을 쫓는 미스터리 추적극이자,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 드라마다. 낯선 환경과 언어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옭아매던 '냄새'들을 회피하는 대신, 도리어 그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기를 선택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매우 감각적이고 밀도 높은 문체로 묘사한다. 독자들은 시장 골목의 매콤달콤한 냄새, 비 오는 날의 습기, 오래된 사진첩의 묵은내 등 생생한 묘사를 통해 후각적 심상을 간접 경험하게 된다.

편집되는 기억, 그리고 정직한 감각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우리의 기억은 과연 얼마나 진실한가"다. 인간은 방어기제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거나, 타인의 서사로 자신의 기억을 덮어씌우기도 한다. 딸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진실을 은폐하고 가공된 '행복한 현재'를 종용하는 에이미 아버지의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과거가 거세된 채 온전한 현재를 영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맥락에서 에이미의 증후군은 단순한 질환을 넘어 은폐된 진실을 발굴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논리나 언어와 달리 후각은 조작되지 않는 원초적 감각이기 때문이다. "사랑해서 그랬다"는 변명은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과거'를 소환하는 냄새 앞에서 힘을 잃는다. 진실이 밝혀질수록 주인공의 내면에 난 공백이 채워지는 과정은, 단순한 추리극을 넘어 잃어버린 자아의 파편을 조립하는 복원 작업에 가깝다.

'여기'와 '지금' 사이, 침묵의 공간을 건너는 법

원제 『The Space between Here & Now』는 다층적인 의미를 함의한다. 일차적으로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주인공이 겪는 현재와 과거의 간극을 지칭하지만, 서사가 전개됨에 따라 이 '공간'은 인물들 사이의 '침묵'으로 치환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명목으로 묵인되어 온 거대한 단절의 틈을 작가는 섬세하게 포착한다. 소설은 주인공이 그 간극을 주체적으로 건너가 진실을 대면하는 용기를 조명하며, 과거를 회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마주하고 화해할 때 비로소 온전한 '지금(Now)'을 살아낼 수 있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온기, 작가 사라 석(Sarah Suk)

K-뷰티를 소재로 한 풋풋한 전작 『Made in Korea』와 비교해, 이번 신작은 한층 더 깊고 묵직한 내면의 심연을 탐구한다. 그러나 그 시선은 결코 냉소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상처 입은 인물들을 포용하는 온천수에 가깝다. 한국계 디아스포라 작가로서 이민 가정의 세대 갈등, 언어적 장벽,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를 SF적 상상력과 매끄럽게 결합한 작가적 역량이 돋보인다.

과거의 이해를 통한 '현재'의 구원

이 책은 단순한 하이틴 로맨스나 타임슬립 판타지로 치부하기엔 그 함의가 깊다. 상실을 겪은 이들을 향한 문학적 위로이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 헤매는 이들을 위한 세밀한 이정표다.

에이미는 과거로 돌아가 현실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의 실체를 온전히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현재를 구원해 낸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도피하지 않고 기꺼이 끌어안는 태도야말로 우리가 '여기, 그리고 지금'을 주체적으로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섬세한 감정선과 따뜻한 여운을 찾는 독자들에게, 일상의 익숙한 냄새들이 일깨우는 기억의 파편을 찬찬히 마주해 볼 수 있는 훌륭한 문학적 체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콘텐츠는 생성형 AI를 이용해 작성되었으며, 관리자의 부분적 수정 및 검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