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대평원에 새겨진 침묵의 유산, 우리 부모의 거친 손마디가 일군 눈부신 서사
- 캐나다 대평원의 척박한 바람을 견디며 삶을 일구었던 우리 부모 세대의 숭고한 희생과 눈물을 기록
- 북한에서 온 아버지의 비밀과 뉴욕 변호사 딸의 갈등, 그 트라우마를 치유의 연대기로 승화시킨 수작
- 이민가족의 침묵과 방황이 서로를 용서하고 자긍심을 회복하는 한국계 캐나다 문학의 새로운 이정표
열 살 소녀는 나이아가라폭포와 러시모어산을 가로지르는 갈색 밴의 뒷좌석에서 글을 썼다. 1980년대, 낯선 캐나다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 식료품점을 팔고 대륙을 횡단하던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그 소녀는, 자신이 읽던 책들처럼 금발 머리 백인 소녀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썼다. 그때만 해도 한국인의 이야기가, 우리 부모님의 그 투박한 손마디가 문학으로 이끌어 줄거라는 사실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소녀는 이제 당당히 한국계 캐나다인의 정체성을 품은 작가가 되어 돌아왔다. 앨버타주 에드먼턴에서 태어나 밴쿠버와 뉴욕을 거쳐 현재 캘거리에서 활동 중인 제인 박(Jane Park)의 데뷔 소설, "유산(Inheritance: A Novel)"(2026)은 그렇게 한 개인의 성장을 넘어 캐나다 한인 이민 사회의 거대한 역사를 복원해낸다.
이 소설은 뉴욕의 성공한 변호사 앤 킴(Anne Kim)이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고향 에드먼턴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앤은 과거를 지우고 성공을 향해 질주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했던 전형적인 이민 2세대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진실은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아버지가 사실은 북한 출신이었으며, 북에 두고 온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 부치지 못한 채 간직해온 편지들은 1980년대와 90년대, 앨버타의 작은 마을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치열하게 살아냈던 가족의 풍경을 소환한다. 그곳에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지워버린 부모의 무거운 침묵이 있었고, 그 기대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과도한 성취주의에 빠진 앤과, 반항 끝에 가족과 멀어진 남동생 찰스의 아픈 사연이 있었다.
책의 출판 즈음에 다양한 미디어에서는 이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서평 전문지 <쉘프 어웨어니스(Shelf Awareness)>는 “가족 관계에서 가장 가깝지만,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를 아프게 요약해냈다”라고 평하면서, 이 소설이 다루는 세대 간의 갈등이 보편적인 울림을 준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주요 비평가들은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파동이 어떻게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캐나다 대평원의 식료품점 선반 위까지 전달되는지를 추적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에 주목했다. “작가 제인 박은 강렬한 플롯과 입체적인 캐릭터를 통해 이민자의 삶이 단순히 고난의 기록이 아니라, 복잡한 인간 존엄의 회복 과정임을 증명했다”라는 평가는 이 소설이 캐나다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 제니 헤이준 윌즈(Jenny Heijun Wills)가 이 작품을 두고 "파헤쳐진 가족의 비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은밀한 진실"이라 평했듯이, 소설은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부모님의 침묵 속에 얼마나 거대한 역사의 파고가 숨어 있었는지를 서서히 드러낸다.
맥도웰 펠로우(MacDowell Fellow)이자 밴프 센터의 라이팅 스튜디오 등 권위 있는 프로그램을 거친 제인 박의 글솜씨는 이민 1세대 부모님들이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비밀’을 ‘수치’가 아닌 ‘살아남기 위한 거룩한 투쟁’으로 격상시킨다. 소설 속 아버지가 북한에 형제를 두고 왔다는 설정은 우리 민족이 겪은 분단의 아픔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깊숙이 침범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아버지가 캐나다에서 겪은 인종차별과 고된 노동을 북한의 형제에게 전하려 했던 편지들은, 그가 견뎌온 세월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남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는 캐나다 전역에서 식료품점과 세탁소, 식당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가르쳐온 우리 부모세대의 침묵 뒤에 숨겨진 거대한 서사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씨네 편의점"의 작가 최인섭(Ins Choi)이 "이민자 자녀라면, 특히 북미의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추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가 주인공 앤 킴이 아버지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과정을 통해 1990년대 캐나다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의 공기와 한국전쟁이 남긴 세대간의 상처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것은 "라이브러리 저널(Library Journal)"이 이 작품을 두고 "한국전쟁의 영향과 이민자들이 직면한 도전을 찾는 독자들에게 강렬한 만족감을 준다"는 분석과 통한다.
작가는 주인공인 딸 앤 킴의 시선을 통해 이민 2세대가 겪는 이른바 ‘성취에 대한 강박관념’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부모의 희생을 보상해야 한다는 부채감은 그녀를 성공한 변호사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반면 남동생 찰스의 반항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또 다른 이민 가족의 슬픈 자화상이다. 작가는 이들의 갈등을 단순히 세대 차이로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상속된 트라우마’로 규정하며, 그 트라우마를 똑바로 바라볼 때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유산"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물질적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가 겪은 고통의 역사, 그들이 차마 말하지 못했던 눈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선 강인한 생명력이다.
이 책은 캐나다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긍지를 심어준다. 1980년대 앨버타의 시골 마을, 거친 바람이 부는 대평원 한복판에서 동양인 가족이 겪었을 외로움은 이제 제인 박이라는 작가의 손을 통해 영원히 기록될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작가가 자신의 홈페이지(www.janepark.ca)에서 밝힌 것처럼, 이제 더 이상 백인 소녀의 이야기를 빌려 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얼굴과 우리의 이름, 우리의 사투리와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곧 세계가 읽는 이야기가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UBC)에서 MFA 과정을 밟으며 다듬어진 그녀의 유려한 문체는, 이민자들의 삶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선망과 존경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흔히 부모 세대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돈에 집착했는지, 왜 그렇게 자식의 교과 성적에 일희일비했는지, 왜 과거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는지 묻곤 한다. 제인 박은 이 소설을 통해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 침묵은 잊기 위함이 아니라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앤 킴이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정의내리듯, 이 소설을 읽는 한인 2세들은 부모의 주름진 손이 캐나다라는 낯선 땅 위에 얼마나 위대한 탑을 쌓아 올렸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민 1세대 부모들에게는 당신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으며, 그 고난의 세월이 자녀의 손을 통해 이토록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다는 위로를 건네주고 있다.
"유산"은 단순히 한 가족의 비밀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물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한국과 캐나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끊어진 다리를 잇는 화해의 복음이다. 제인 박은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깊이로 우리 삶의 가장 아픈 구석을 어루만진다. 이 소설이 캐나다 문단에서 높은 평가가 기대되는 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인 감동을 준다는 진리를, ‘한국계 캐나다인’이라는 독특한 렌즈를 통해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오늘날 캐나다 사회의 주역으로 당당히 서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 책은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대평원의 흙먼지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우리의 존엄, 그 눈부신 ‘유산’을 확인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제인 박이 그려낸 앤 킴의 여정 끝에는,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할 ‘진정한 자아’와 ‘가족이라는 이름의 구원’이 분명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캐나다 땅을 딛고 서 있는 우리 자신의 발걸음이 한층 더 당당해졌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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